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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출간한 ‘불량한 책들의 문화사’(푸른역사)의 저자 고영란 교수는 제국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출판문화만큼 훌륭한 재료는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일본에서 근현대 문학을 강의하는 인물로 2010년부터 출판물들의 생존 방식에 주목해 왔다. 일본제국의 근대사 다시 쓰기를 주장해 온 저자는 ‘전후라는 이데올로기’, ‘검열의 제국’ 등 책을 펴낸 바 있다. 이번 작품에는 1900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출판사가 신문사의 경영인, 편집인의 회고록, 일지, 경영자료 등을 닥치는 대로 조사한 지은이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의 제국 연구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다.
■ 제국의 근현대사, 출판문화로 맥을 짚다
저자는 문학사, 문화사, 사상사, 사회 운동사 등을 아우르며 제국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출판문화라는 재료를 마음껏 활용한다. 일본제국이 전쟁 프로파간다를 위해 하야시 후미코 등 순문학 소설가들을 전장에 보내 종군기를 쓰게 하고 고단샤나 아사히 신문사 사장을 대외 선전을 위한 전쟁 담당 부서에 동원하는 이유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불량한 책들의 문화사’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강력한 검열도 출판문화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본제국은 내무성 산하에 출판 경찰을 두고 있었고 사상 검사로 활약했다. 저자는 이러한 판매 금지 명령이 떨어지더라도 감시망을 피해 수레를 동원한 ‘전도 행상’ 등을 통해 유통하고 수익을 내는 출판 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둔다. 이와 함께 일본제국의 합법·불(비)합법 출판 자본이 식민지 조선의 출판시장과 어떻게 만나는지 파고든다.
■ 권력이 탄압이 만들어낸 부가가치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프롤레타리아’에서는 러일전쟁 후 간행된 최초의 ‘공산당 선언’의 일본어 번역에서 ‘proletariat’의 번역어로서 ‘평민’이 선택된 과정과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을 논의한다. 2장 ‘도서관’에서는 제국의 아카이브로써 조선의 도서관에 주목하고 그것이 어떠한 말과 사람을 포섭하고 배제했는가를 논증한다. 3장 ‘불령선인’과 4장 ‘검열’에서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일본 본토에서 출판한 후 내무성 도서관에서 검열을 받은 후 한반도에 반입하는 전술을 전개했음을 이야기한다.
<기억을 새겨드립니다>(2025년 5월 출간)는 이은정 작가의 세 번째 소설이다. 꾸준히 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은정 작가는 소설가보다는 에세이스트로서 더 알려져 있다.
내가 아는 이은정 작가는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토닥이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이다. 나는 작가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우연한 계기로 책을 읽은 뒤 그의 팬이 됐다. 28년차 사서인 내가 일하는 도서관에 강사로 초청해 북토크 강연을 하기도 했다.
피부에 새겨진 기억, 마음에 새겨진 위로
이 작가는 에세이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도 한결같이 '상처가 회복되는 이야기',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으로 덮어지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장편소설 <기억을 새겨드립니다>에서도 끊임없이 위로와 회복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쩌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위로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은정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항상 작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소설 속 인물 안에 자신을 투영시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살기 위해서는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이 글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렇게 솔직한 글을 쓰는 작가이기에 계속 응원하고 애정하게 된다.
작가는 책을 출간한 후 자신의 SNS에 당당히 홍보글을 올렸다. 예전에 내가 알던 이은정 작가라면 결코 시도하지 못했을 대범한 행동이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임을 잘 알기에, 앞으로 나서는 것보다 살짝 비켜서 있는 것이 마음 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모습을 보고 놀라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쭈뼛대지 않고 정면돌파를 선택한 작가의 용기에 나마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책 팔아 집세도 내고, '장군이'(작가가 키우는 반려견) 다리에 주사도 놔줘야 한다는 작가의 고백에 마음이 해사해졌다.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작가님~앞으로는 책 나오면 대놓고 홍보하세요. 평점 같은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작가님이 얼마나 치열하게 글을 쓰고 있는지 잘 아는 독자 중 한 명이니까 작가님 책이 나오면 무조건 살 거예요. 그냥 계속 쓰세요"라고.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작가 이야기는 잠시 접고, 이제 소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소설 속에는 간호사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다 그 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기억을 새겨주는 타투이스트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리의 이야기가 고통의 편린처럼 잘게 부서진다.
작가가, 어떻게 보면 매력적일 수도 있지만 한편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도 느껴질 수 있는 '타투'라는 소재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개성과 멋의 표현을 위해 타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처를 숨기거나 가리기 위해 타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그 시간을, 그 사람을, 그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타투를 한다는 또 하나의 이유를 이번 소설로 접하게 됐다. 그래서 어쩌면 '타투'가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에 설득당했다. 대한민국에서는 '타투'가 여전히 불법적인 시술이지만, 꾸준히 성업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 get more info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타투에는 그날의 기억까지 함께 새겨진다. 타투는 피부에 남아 눈에 보이는 기억이다.
- 타투이스트 해빗-
이은정 작가는 누군가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기다려줄 줄 아는 다정한 타투이스트를 소설 속에 등장시켜, 보수적인 생각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주인공 모리(민정)를 과거에 자해와 상실의 늪에 가두었던 설정 역시 '기억을 새긴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데 있어 매우 효과적인 선택이었다. 읽는 내내 모리(민정)와 이은정 작가가, 읽는 내내 모리(민정)와 나 자신이 수시로 겹쳐졌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상처, 가리고 싶은 흉터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을 새긴다. 모든 사람이 좋은 추억만 가지고 오는 건 아니다. 상처를 새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증오나 복수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상처를 몸에 새겨 그걸 극복한 날들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살겠다는 의지. 좋은 기억을 입히면 추억을 곱씹으며 살고 상처를 입히면 극복한 자신을 곱씹으며 산다. 어느 쪽이든 살기 위해 나를 찾아온다(195쪽)
모리(민정)가 타투를 하면서 위로받고 치유받았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를 위로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기억이나 추억을 복원해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타투이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타투'가 하나의 예술 분야이자 전문적인 영역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음지에서 비밀스럽게 활동하지 않고 당당하게 문화 예술 창작자로서 나설 수 있는 날이 곧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불어 한 가지 바람을 더 가져본다. 회복되지 않는 상처, 치유되지 않는 아픔, 여전히 욱신거리는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며 '당신의 흉터가 좋은 기억으로 커버업 되기를, 마침내 회복하기를 빈다(245쪽)'라고 말하는 작가의 소망이 이뤄졌으면 하는 것. 그 말대로,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새로운 삶을 찾아 도전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런가 하면 8장 ‘전쟁’에서는 일본 미디어의 한국전쟁 보도가 구 일본제국의 지적 체계와 경제력의 부활이라는 현실을 은폐하며 폭력에 가담하지 않는 ‘중립적인 평화 국가, 일본’의 자화상 그리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분석한다. 책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자 식민지를 전면에 내세운 단행본임에도 이례적으로 일본 미디어의 많은 주목을 받으며 “식민지 조선의 출판 유통을 조망하면서 ‘내지’와 식민지의 복잡한 교섭과 갈등을 예리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